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칼 16세 구스타프 (문단 편집) === 결혼 === [[파일:image-merge-1679978520292.png.jpg|width=100%]] '''1972년 [[1972 뮌헨 올림픽|올림픽]]이 열리는 [[뮌헨]]에 갔다가 3살 연상의 [[독일]]/[[브라질]] 여성 실비아 좀멀라트를 만나게 된다'''.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졌으나 당시 스웨덴 왕위 계승법은 여자는 왕이 될 수 없고[* 다만, [[의회]]의 승인 하에는 여왕이 계승하는것도 가능은 했다.], 남자는 왕족이나 왕족에 견줄만큼 신분이 높은 여성이 아닌 다른 여성과 결혼하면 왕위계승권을 박탈하는 엄격한 [[귀천상혼]]제가 적용되었었다. 이는 여성 왕족들도 마찬가지였다. 이로 인하여 그 때 스웨덴에는 칼 구스타프와 그의 삼촌인 할란드 공작 베르틸 이외에는 모두 왕자 칭호를 박탈당하거나 사망하여서 왕위계승자가 남아있지 않았다. 칼 구스타프의 친할아버지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당연히 왕족과 결혼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방해했는데, 칼 구스타프는 실비아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어림도 없었다. 그러나 구스타프 6세가 사망하자 칼 16세 구스타프로 즉위하면서 계승법을 바꿨으며[* 그래서 귀천상혼이 폐지되자마자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을 잃었던 친척들이 자기들의 계승권을 돌려달라고 한 일도 있었다.] 결국 의회의 승인을 얻어 1976년 6월 19일 [[스톡홀름]] 대성당에서 열린 결혼식은 1976년 6월 19일 스톡홀름 대성당에서 올로프 순드비 웁살라 대주교가 거행하였다. 국왕이 평민과 결혼한 것은 [[에리크 14세]] 이후 처음이었다. 전날의 결혼식 전야제에서는 스웨덴의 유명한 팝그룹 [[ABBA|아바]]가 스웨덴의 미래 왕비를 기리기 위해 "[[Dancing Queen|댄싱퀸]]"을 공연하였다. 운 좋게 친할아버지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왕위계승 서열 1위의 왕세손이었던 칼 구스타프는 평민과 결혼했다가 귀천상혼에 걸려서 계승권을 잃을 판이었다. 덕분에 스웨덴에서 군주의 역할이 엄청 감소했다. 이를테면 스웨덴에서는 1975년부터 총리(국회에서 선출)를 국회의장이 최종적으로 임명·면직하고, 총리가 직접 장관을 임명·면직하는 구조로 바뀌었다. 또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바로 법률로 성립되게 바뀌었다. 이전에는 국왕이 총리·장관을 임명·면직하고, 국회에서 가결된 법안을 승인하는 등 상징적인 절차를 밟았다. 물론 실제로는 이미 결정된 걸 국왕이 상징적으로 추인하는 것이었지만 오늘날 스웨덴 국왕은 이런 형식적인 권한도 빼앗겼다. 물론 신임장(특정인을 외교사절으로 파견하는 내용을 담은 문서)에 사인을 하는 등 국가원수로서 몇 가지 역할이 남아 있긴 하지만, 다른 입헌군주국의 군주들에 비하면 역할이 훨씬 적다고 할 수 있다. 어쨌든 그 다음엔 부모같이 길러준 숙부 커플을 정식으로 결혼시켰고, 릴리안은 '할란드 공작 부인'이라는 칭호를 얻어 정식으로 스웨덴 왕실에 입성했다.[* 베르틸 왕자는 1997년 84세로 세상을 떠났고, 릴리안 왕자비는 2013년 97세로 세상을 떠났다.] 이후 구스타프와 그의 가족은 1980년에 스톡홀름 서쪽의 [[드로트닝홀름 궁전]]으로 이주했다. 그러나 그와 부인은 여전히 스톡홀름 왕궁에 사무소를 유지해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